러시아가 북극해를 단순한 해상 운송로가 아닌 철도·항만·상선·쇄빙선망을 통합한 ‘북극 횡단 운송회랑(TTC)’으로 개발하기 위한 대규모 투자계획을 내놓았다.
총 투자 규모는 2035년까지 약 10조 루블(약 1,500억 달러)로, 우리 돈으로 약 225조 원에 달한다.
러시아는 이를 통해 북극권 원자재 프로젝트와 해외 시장을 연결하고, 북극항로(NSR)를 극동과 발트해를 잇는 핵심 물류축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북극항로를 운영관리하는 로사톰(Rosatom)의 최고경영자(CEO) 알렉세이 리하체프는 최근 러시아 경제지 ‘엑스퍼트(Expert)’와의 인터뷰에서 TTC의 2035년까지 재정·경제 모델이 마련됐다고 밝혔다.
러시아 정부 산하 소식통들에 따르면 해당 모델은 이미 연방정부에 제출돼 검토 절차에 들어갔다.
러시아의 TTC 투자계획은 2030년까지 5조 루블, 이후 2035년까지 추가로 5조 루블을 투입하는 구조다.
재원은 정부 예산뿐 아니라 민간 및 국제 투자, 자기자본과 차입금 등을 함께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투자 대상에는 북극권 항만과 접근 철도, 물류 인프라 확충은 물론 쇄빙선과 아이스급 상선 등 선박 건조·개조도 포함된다.
리하체프 CEO는 TTC에 투입되는 자금이 단순한 인프라 비용이 아니라 경제적 수익을 창출하는 투자라고 강조했다. 로사톰 측은 TTC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1루블당 약 10루블의 경제적 승수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TTC를 단순한 교통 인프라 사업이 아니라 국가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전략 프로젝트로 규정하는 배경이다.
■ 북극항로 화물 2035년 1.1억~1.5억톤으로 확대
핵심은 북극항로의 화물 처리능력을 대폭 끌어올리는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2년간 북극항로 화물량은 3,700만 톤을 웃도는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로사톰은 올해 북극항로 화물량도 전년 대비 약 14% 증가한 4,200만 톤 이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035년 목표는 이보다 훨씬 높은 1억 1,000만~1억 5,000만 톤이다. 낙관적인 시나리오에서는 2040년까지 화물량을 2억 톤 수준으로 확대할 가능성도 제시됐다.
이는 러시아가 북극항로를 북극권 에너지·광물 프로젝트의 수출 통로를 넘어 국제 물류망의 주요 축으로 육성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야말(Yamal) LNG 등 북극권 에너지 프로젝트가 확대될 경우 LNG선과 쇄빙선 수요도 함께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는 이에 대비해 쇄빙선뿐 아니라 아이스급 상선대 자체를 확대·현대화한다는 구상이다.
■ 극동~발트해 연결…‘북극 물류 고리’ 구축
TTC의 특징은 북극항로 자체만 개발하는 데 있지 않다.
러시아는 북극해 연안을 따라 항만과 철도, 내륙수로를 연결하고 극동 항만에서 발트해 항만까지 이어지는 통합 운송망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즉, 북극해를 통과하는 선박 운송과 육상 철도망을 결합해 러시아 북극권의 원자재 생산지와 극동·발트해 항만을 하나의 물류 시스템으로 연결한다는 구상이다.
러시아 정부는 이를 통해 북극권의 석유·천연가스·광물 등 원자재 수출을 확대하는 동시에 동남아시아와 인도, 페르시아만, 아프리카 등 신흥시장에 대한 물류 접근성을 확보한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서방 제재 이후 러시아가 유럽 중심의 기존 물류망에서 벗어나 아시아·중동·아프리카 중심의 새로운 수출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전략과도 맞물려 있다.
■ 해운업계 핵심 변수는 ‘쇄빙선+아이스급 상선’
TTC가 실제 국제 운송회랑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육상 인프라뿐 아니라 선박 공급능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러시아는 북극항로 운항을 지원하는 쇄빙선대 확대와 함께 아이스클래스 상선의 재편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북극항로의 계절적 운항 제약을 완화하기 위해 연중 운항 능력을 갖춘 쇄빙선과 내빙선의 확보가 핵심 과제로 꼽힌다.
리하체프 CEO는 북극 인프라가 실제 수요보다 뒤늦게 건설돼서는 안 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LNG 및 원자재 프로젝트가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할 경우 선박과 항만, 철도 등의 공급능력이 동시에 따라붙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TTC의 경쟁력은 특정 항만이나 철도 하나의 성능이 아니라 화물 생산→철도 운송→항만 선적→쇄빙선 지원→아이스클래스 선박→해외 항만으로 이어지는 전체 공급망의 동기화 여부에 달려 있다는 의미다.
■ 최대 위험은 ‘인프라 개발의 비동기화’
리하체프 CEO가 TTC 개발의 가장 큰 위험으로 꼽은 것도 바로 이 문제다.
항만을 먼저 건설하고 철도가 뒤처지거나, 철도는 완공됐지만 선박이 부족할 경우 실제 화물 운송능력은 늘어나지 않는다. 반대로 화물이 확보돼 있어도 필요한 계절에 선박이 북극항로를 통과하지 못하면 물류회랑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러시아는 이에 따라 TTC를 개별 인프라 사업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통합 시스템으로 개발하는 것을 재정·경제 모델의 핵심으로 설정했다.
리하체프 CEO는 북극 인프라 사업에서는 개발 지연 자체가 막대한 비용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쇄빙선과 항만, 철도는 계획부터 건설·운영까지 수년에서 수십 년이 걸리는 만큼 선제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 국제 투자 유치가 관건…한국·중국·인도 등도 관심
러시아가 10조 루블이라는 막대한 투자금을 모두 국가재정으로 충당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TTC의 실제 추진 속도는 민간 및 해외 자본을 얼마나 끌어들일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다.
러시아 극동·북극 개발 당국은 중국과 일본, 한국, 인도 등 아시아 국가의 TTC 투자 관심을 언급해왔다. 특히 항만 터미널과 컨테이너 서비스처럼 안정적인 화물 기반을 확보할 수 있는 분야가 해외 투자자들에게 상대적으로 매력적인 영역으로 거론된다.
러시아는 또 북극권 개발에 필요한 인력 규모를 2030~2035년까지 약 2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에 따라 단순한 물류 인프라 건설을 넘어 북극권 도시와 주거·의료·교육 인프라를 함께 확충해야 한다는 과제도 안고 있다.
■ ‘북극항로’에서 ‘북극 물류 네트워크’로
이번 TTC 구상은 러시아의 북극항로 정책이 한 단계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존 북극항로 정책이 북극해를 통과하는 해상 운송량 확대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TTC는 이를 철도·항만·내륙수로·쇄빙선·상선까지 연결한 종합 물류 네트워크로 발전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러시아가 2035년까지 10조 루블을 투입해 실제로 1억 5,000만 톤 규모의 화물 처리능력을 구축할 수 있을지가 향후 글로벌 해운업계의 주요 관심사가 될 전망이다. 특히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기존 수에즈 운하 중심 물류망에 북극항로가 어느 정도 대체재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다만 러시아 역시 북극항로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운송비용, 쇄빙선 운항비, 항만 인프라, 선박 확보, 계절적 운항 리스크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결국 TTC의 성패는 10조 루블이라는 투자 규모 자체보다 이들 인프라를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동시에 구축해 실제 화물 운송 서비스로 연결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